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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게이츠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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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정치인, 사회주의 경제학자.[2] 노동당 당수직을 역임하였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정계를 은퇴한 이후 1955년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의 당수로 선출되어, 1963년 사망할때까지 약 8년간 직위를 맡았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06년 4월 9일 영국 런던 켄싱턴 지역에서 인도 공무원인 아서 게이츠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복한 중산층 집안이었기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어린 휴 게이츠컬은 기숙 학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장성한 이후에는 윈체스터 대학교의 경제학과에 진학했으며 1924년부터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게이츠컬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정의내리며 1926년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였다. 또한 노동자들을 위해 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던 게이츠컬은 엥겔베르트 돌푸스 정권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탄압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민주주의임을 깨닫고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이후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
2.2. 내각에서[편집]
1935년 그는 채텀 지역구의 노동당 서민원 의원으로 출마하나 낙선한다. 이후 1938년, 국립 경제 사회 연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잠시 경제학자로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치러진 1945년 서민원 의원 선거에서 게이츠컬은 리즈 사우스 지역구에 출마해 6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3]
2.3. 야당 당수로서[편집]
2.4. 급작스러운 사망[편집]
수에즈 사태와 경제사정 악화 등으로 인하여 보수당 심판 여론이 높아지자, 1964년 영국 서민원 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의 승리가 점쳐지며 차기 총리로 유력하였다. 그러나 선거를 불과 1년 앞두고 독감이 악화되어 급사하였다.[4] 그의 죽음은 영국 정계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도유망했던 56세의 장성했던 정치인이 고작 독감에 걸려 숨지자, 영국의 보수 정치인들과 노동당에 반대하던 귀족들은 그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의심했다. 게이츠컬 당수가 1963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을 만난 이후 급작스럽게 독감 증세가 악화되어, 합병증이 발병하여 숨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소련이 게이츠컬 당수를 독살하고 소련의 스파이인 해럴드 윌슨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돌았다.
그러나 MI5의 지속적인 조사 끝에 게이츠컬의 사망은 단순한 합병증의 악화로 인한 것일 뿐이며 해럴드 윌슨 혹은 소련 KGB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5] 그의 사후, 게이츠컬의 지역구였던 리즈에서 "휴 게이츠컬 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78년에는 웨스트 미들랜드의 샌드웰 지역에 있는 공공주택 사업의 이름이 "게이츠컬 공공주택 사업"으로 정해지기도 하였다. 그의 시신은 헴프스테드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정치 성향[편집]
5. 대중매체에서[편집]
- 더 크라운의 시즌 3 1화 "Olding"에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이 해럴드 윌슨을 KGB의 스파이로 여기며, 상대적으로 반소파였던 게이츠컬이 암살되었다고 의심하면서 이름이 언급된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영국 정보국장이 직접 "게이츠컬 당수는 합병증이 악화되어 숨진 것일 뿐이다"라고 음모론을 일축한다. 오히려 스파이는 버킹엄 궁전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 원어로는 "휴 게이츠킬" 또는 "휴 게이츠켈"이라고 읽기도 한다.[2] 후임인 해럴드 윌슨도 게이츠컬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자, 통계학자였다.[3] 본래 그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경제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수학을 잘 하지 못했던 게이츠컬은 수학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한 학문인 경제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정치인이 되는 것을 더 선호했다.[4] 이로인해 1963년 영국 노동당 지도부 선거가 열린다.[5] KGB에서도 암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게이츠컬의 사후, 윌슨이 당수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드물었다. 실제로 전당대회에서 윌슨은 당초 유력했던 후보들을 극적으로 역전한 끝에 간신히 당수로 선출되었다.